악의가 선의를 해칠 수 있는가?
정의감에 불타던 신입 시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어떤 마수가 뻗쳐오더라도 반드시 지켜내고 말겠다고. 그는 스스로의 대답에 반박해야만 했다. 악의는 선의를 해칠 수 있다. 범죄자가 불특정 다수를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 벌인 소동이, 시민을 구출하기 위해 나선 치안 유지 부대원의 눈을 감길 수 있다. 치안 유지 부대의 누군가는 눈앞에서 죽어가는 동료를 보았다. 죽어가는 이의 아내 되는 동료조차 폭발음 이후로 좀처럼 연락이 닿지 않았다.
“부탁 하나만 하자.”
“말하지 마라.”
“야, 난 이미 글러 먹었다고.”
하여간, 마님도 그렇고 너도 참 나한테 쌀쌀맞다니까. 내가 재잘거리는 게 그렇게 싫나…. 한시도 쉬지 않던 입이 멈추고, 꺼져가는 눈동자가 흔들린다. 대장은 동료의 말에서 그가 무언가 보았음을 눈치챘다. 예로부터 눈이 참 좋은 자였다. 관찰력이든, 훗날 일어날 일이든….
“나 이런 부탁 잘 안 하는 거 알잖아, 응?”
그리고 그는 친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성미 때문은 아니다. 단지, 말을 듣지 않은 채 귀를 닫았다가는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루니타를 부탁해.”
아.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가장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말이 나왔다.
“나는 자격이….”
“네가 아니면 안 돼.”
친우의 말은 퍽 단호하다. 눈앞에서 지혈하는 자의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지도 모른 채로. …어쩌면, 알고 있는데도. 그는 동료의 상처를 억눌렀다. 억지로 쑤셔 넣은 천에 검은 피가 번진다.
“우리 마님 시신은 찾을 수 있을까…. 아, 정말, 정의로운 사람이라니까. 그래서 반했지만….”
내 몸은 마님 옆에 묻어줘. 그는 제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상정하고 있다. 친우의 말은 과장되었을지언정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훗날 대장이 될 자는 목이 막히는 것을 억누르며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그래.”
동료이자, 친우이자, 치안 유지 부대 대원이던 한 아이의 아버지가 웃었다. 그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5월 초. 한창 봄의 기운이 가득한 시기. 드물게 피어있던 꽃은 점차 저물고 여름의 무더위가 다가올 무렵이다. 루니타는 이맘때쯤이면 늘 가던 그곳으로 향했다. 딱히 의무감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저 아스팔트 길을 걷다가 햇빛에 눈 찡그릴 때면 가림막이 되어주던 부모님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거리를 지날 때마다 어린이의 손을 잡고 걷는 부모가 눈에 들어왔음에도, 버섯갓을 뒤집어쓴 아이는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루니타는 대장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꽃집에서 지갑을 꺼냈다. 루니타가 가끔 들르는 곳이었는데, 가게 사장도 매해 찾아오는 이 어린 손님을 알고 있었는지 갈 때마다 꽃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덤으로 주머니에 사탕도 잔뜩 받았다. 잘 다녀와요. 사장의 배웅을 받은 루니타는 한 손에는 붉은 카네이션을, 다른 손에는 흰 카네이션과 흰 국화가 섞인 꽃다발을 들었다.
하나는 제 영웅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루니타는 흰 다발을 들고 택시에 올랐다. 어디로 모실까요? 치안 유지 부대 추모공원이요. 기사는 어린아이가 이런 외진 곳에서 택시를 탄 게 의아했지만 루니타의 이어지는 말에 곧 납득했다.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 대장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혼자 어디론가 간다고 할 때 걱정을 입에 담던 그였으나, 그날만큼은 루니타 단신으로 멀리까지 나가는 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대장은 루니타가 향하는 곳을 알고 있고, 두 사람이 그곳에서 다시 만나는 것은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백미러로 계속 힐긋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량 내부는 고요했다. 기사는 어린 손님이 자신의 거친 운전에 놀라지 않게 하려 핸들을 부드럽게 꺾으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아가씨를 도와줄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올해는 오지랖이 넓은 기사를 만났나 보다. 루니타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소시민은 목적지에 도착하자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여기로 전화해요.”
미약한 도움이다. 치안 유지 부대 사람들처럼 강하지도, 정의감에 죽고 못 사는 사람도 아닌 것 같지만. 루니타는 고맙다며 고개 숙이고 인사한 뒤 택시에서 내렸다. 작게 미스틸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아이야, 너는 좀 사람을 경계할 필요가 있어. 저자가 너를 해치기로 마음먹었으면 어쩌려고? 아니야, 미스틸. 그들은 나를 해치지 않아. 왜? 그냥, 알아.
그들은 양지바른 곳에 고요히 잠들어있다. 잠든 자의 자라지 않는 딸은 늘 공간이 협소하다는 것을 잊고 꽃다발을 한 아름 준비해 갔으며, 대신 가장 싱싱하고 아름답게 피어난 꽃 한 송이씩 골라 두곤 했다. 수많은 유리관 정면에 놓인 의자에 앉아 부모 앞의 사진을 한참 바라본다. 낡았다. 몇십 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루니타는 옷소매로 액자 위의 먼지를 닦았다.
일을 마친 대장은 일부러 기척을 내고 루니타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평소라면 오늘 무슨 일이 있었고 누구를 만났는지 떠들었을 루니타였지만, 대장은 침묵 뒤에 루니타가 할 말을 알고 있었다.
“대장. 그때 몇 명 죽었어?”
“5명.”
“그럼 몇 명 살았어?”
“13명. 그 중 3명은 네 부모님이 구했지.”
“그 사람들은 잘 살고 있을까?”
“그래. 아마 잘 살고 있을 거다.”
“그렇구나.”
루니타는 매년 같은 질문을 던졌고, 대장은 늘 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루니타는 고개를 돌렸다. 대장은 표정이 잘 드러나지는 않는 편이지만…. 눈치 빠른 루니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히 알았다.
“…그런 눈으로 안 봐도 돼, 대장. 나 하나도 안 슬퍼. 진짜로.”
“안다.”
“이제 대장이 있으니까 괜찮아.”
“그것도 알고 있다.”
“그럼 왜 자꾸 미안해하는데?“
….
대장은 침묵을 대답으로 대신한다.
“미안하다는 건 잘못이 있을 때만 하는 거야. 대장은 잘못 없어.”
굳이 말하면, 대장은 고마운 사람 쪽이야. 희생자의 추모는 영웅에 대한 원망의 의미가 아니다. 루니타는 그들이 마지막까지 자신을 생각하다가 간 것을 알고 있었고, 대장은 그런 부모의 소원을 들어준 사람이다.
루니타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기사가 준 명함과 꽃집 사장이 준 사탕이 쑤셔 넣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에 깃든 커다란 손이 사탕의 껍질을 까주었다. 늘 새롭게 생겨나는 악의는 얼룩져있으나, 선의는 낡을지언정 빛바래지 않는다. 악의는 선의를 해칠 수 있으나 결코 지우지는 못한다. ‘착한 사람’이 남긴 흔적은 후대까지 남아 다른 이들의 받침이 되어준다.
루니타는 의자에서 폴짝 내려오며, 과장되게 허리에 손을 짚었다. 정 미안하면 맛있는 거 사줘! 내내 조용하던 대장이 그제야 웃으며 루니타를 따라 일어났다. 밥 먹기 전 슬쩍 군것질했으니 배에 다 안들어가면 어떡하냐는 말을 덧붙였다.
“무엇이 그렇게 먹고 싶은가, 우리 꼬마 아가씨.”
“함박스테이크!”
저번에 그 가게 엄청 맛있었어. 쫑알거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점차 안식처에서부터 멀어져갔다.
그리고 어떤 존재의 작은 축복으로, 흰 카네이션 생화는 며칠이 지나도 시들지 않았다.